생활철학/생각거리

무색무취 인간, 나만의 색은 뭘까?

라라윈 2020. 5. 19. 22:38

나의 특색 찾기, 참 어렵다

제부는 술에 취하면 동생에게 넋두리를 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아무 특색이 없다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눈에 띄는 것도 없고, 자기는 있으나 없으나 한 그런 사람 같다고.

딱히 좋은것도 없고 싫은것도 없다고.


제부 나이 서른 일곱인가 여덟의 일입니다. 그 부부의 나이 차이가 있던 터라, 막 이십대 후반에 접어든 동생은 그 고민을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았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백하자면, 제부의 넋두리를 한심한 선배의 한탄처럼 여겼습니다. 전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나이 서른 일곱 여덟 먹고도 자기 색이 없고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사는 사람이라니.

행인 27, 혹은 47이어도 아무 상관없는 하찮은 삶 같았습니다.


20대 철부지가 제부 나이가 되고 보니...

제가 그 때의 제부의 나이를 지나고 보니, 저도 별 다를 것 없었습니다. 저 역시 특색이 없습니다. 늘 좋고 웬만하면 다 괜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딱히 좋아하는 것도 딱히 싫어하는 것도 없습니다. 어릴 적엔 싫은 것도 참 많았는데, 이젠 싫은 것도 별로 없습니다. 무엇을 싫어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늘 다 괜찮아야 하니까요. 늘상 “전 다 괜찮아요.”를 입버릇처럼 말하며 살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의욕이 없었습니다.

멘토가 물었습니다.


왜 열심히 안 하냐고.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요? 글쎄요....

늘 괜찮고, 그냥 저냥 맞추며 살다보니 이제는 제가 뭘 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을 뿐.

제가 벌려 놓은 일들을 마무리 해야 하고,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우습게도 한참 고민해서 멘토에게 제가 하고 싶다고 말한 것은 “블로그를 두 개 더 만들까 봐요.” 였습니다. 블로그 하나 만드는데도 이렇게 고민이라니...

멘토는 “그래.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라고 했습니다.


가끔 무심히 들은 말이 울려 퍼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말이 그랬습니다.

그래, 사람이 하고 싶은거 하고 살아야지. 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며 살고 있는 인생에 잔물결이 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세상에는 욜로, 워라밸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욜로가 뭐냐 하니, 한 번 사는 인생 멋드러지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거 멋진거잖아요! 근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욜로욜로 거리는 것이 꼴불견"이라는 여론이 들썩였습니다.

벌써요? 전 이제 욜로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뒤늦은 저와 달리, 어떤 사람은 욜로 쫓아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대책없이 제주도로 이주했다가 제주의 텃세에 못 견뎌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퇴직금을 털어 넣어 세계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참 빠르기도 하시죠. 어떤 사람은 욜로 쫓아서 대학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하는 대신 세계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왔는데 취업 준비 시즌을 놓쳐 취업이 안 되어 망했다고 합니다.


욜로가 싫어졌습니다. 불편했습니다. 트렌드로서 인생을 멋지게 살자는 것이.

애초에 '무슨 무슨 족'이라는 말이 불편합니다. 욜로족. 딩크족. 니트족. 골드미스. 이렇게 사람을 트렌드에 따라 분류하는 단어들은 선행오류가 있습니다. 딩크족이 유행하니까 트렌드를 쫓아 아이를 안 낳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부부가 논의하여 자녀를 갖지 않기로 합의하는 경우가 늘다보니 그들을 가치켜 '딩크족'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난 것 입니다. 골드미스가 트렌드라서 결혼을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결혼 안 한 경제력 있는 여자가 많아지니까 골드미스라는 단어가 생겨난 것 입니다.


사람을 트렌드에 따라 분류해 버리는 단어는 마치 SES가 재결합 한다고 하니 "걸그룹이 유행하니 다시 활동하냐?"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걸그룹이라는 단어가 없을 때부터 활동했습니다. (걸그룹 시조새 같은 분들)


욜로가 싫어졌다는 것은 욜로의 의미가 싫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형태마저 트렌드화 되면서 ‘욜로족’ 따위로 묶여 또 다시 개성없이 트렌드에 휩쓸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아도 이미 개성이 없는데....


또한 씁쓸한 좌절도 던져 주었습니다. 제 딴에는 고심해서 ‘나의 색을 찾고 싶다’라고 했는데, 세상에서 욜로가 유행하면 대뜸 “아, 욜로?”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아니라고! 욜로, 워라밸, 소확행 때문이 아니라고!"

라며 허공에 대고 소리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욜로도, 워크라이프밸런스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도 다 공감하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이런 단어들이 유행하기 십 수년 전부터 공부하기도 했습니다.(심리학에서 워라백은 오래된 연구주제 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트렌드’라는 폭풍에 휘말리는 순간, 제 삶의 특색이나 의미마저 홍수에 휩쓸려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공감하지만 공감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홍수에 떠 내려가는 와중에 어떻게 해야 제 인생의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까요.

대단한 것을 바란 것이 아니라, 바닷가 조약돌이 비슷하지만 저마다 조금씩 다르고 다 예쁜 것처럼 조금 다른 특색있는 제 삶을 찾고 싶었습니다. 색을 찾고 싶다는 것, 더 없이 소박하지만 거창하고 어려운 목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