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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의 지각인생

· 댓글개 · 라라윈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ㅡ손석희





서른, 무언가 결과를 보여주어야 할 것만 같은 나이이다.
20대를 끝내는 기점으로 20대에 일구어 놓은 것들이 결과로 보여져야 할 것 같은 중압감이 온다.
경제적으로 집, 차, 통장 잔고 같은 것들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야 할 것 같았고,
학업적으로 공부도 많이 해 두어야 할 것 같았고,
직업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고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서른을 한달도 안 남겨둔 상황에서 어느 것 하나 된 것이 없었다. 옛날같으면 여자 나이 서른이면 결혼을 해서 아이라도 하나 낳아두었을 시기에 , 무엇 하나 해 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조바심이 났다.

그 때 이 글을 읽었다.

손석희 아나운서는 업계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잘 살아남고 있는 사람 중 하나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결론을 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론을 진행할 때도 양측의 의견을 종합하여 토론참가자들이 결론을 내도록 하지, 결코 본인의 주관대로 결론을 내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의 찬반론자들에게 반발을 살일도 시비에 엮일 일도 없어 오랜 세월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밖에도 이 분에게 배울 점도 많고 분명 성공한 방송인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런 사람이 지각인생이라 하니..

해놓은 것 없이 조바심만 치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나도 조바심보다 차라리 한 발 물러서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조바심을 낸다고 보름 뒤가 엄청나게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커질 수 있을 뿐이다.

한 발 물러서자. 한 발 늦게 가면 어떤가. 큰 일 날것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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