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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별도 마다않는 아빠들의 사랑

· 댓글개 · 라라윈
아는 분이 공사현장의 구내식당을 맡아 하시게 되어, 도와드릴겸 용돈 벌겸 자주 가곤 했습니다. 
공사현장에 가보니 흔히 말하는 '노가다'이미지가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가다 같은 험한 일 안하려면 공부해야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인지, 저는 공사현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모두 공부도 못하고, 다른 일이 없어서 하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들 대부분은 목수, 전기기술자, 특수기술자 등 전문기술을 보유하신 분들이시거나, 공사현장에 얽힌 여러 업체(대기업, 중소기업)들의 정직원들이었습니다. 업체 사장님, 팀장님들도 많았구요. 먼지날리는 현장으로 출근하고, 현장에 알맞게 편안한 작업복과 안전화를 신고 다니셔서 남보기에는 모두 '노가다' 같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건설현장 근무자들에 대한 오해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거주지역과 관계없이 공사를 맡게되는 지역에 가서 지내야 하다보니 대부분 생이별 이산가족으로 지내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자녀또래의 저를 보고 자신의 아이가 생각난다며 잘 해주시던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자녀생각이 나고 가족이 그리워지셔서인지, 절 보면 유독 말씀이 많아지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내용은 자녀자랑이었습니다. 무뚝뚝해보이시는 분들도  자녀이야기에는 말수가 많아지시면서 흥이 나시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하도 자식자랑을 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그 때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 아이들은 문제아가 하나도 없어. 다 모범생이야. 다 장학생이고, 다 공부 잘하고, 다 말 잘듣고, 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잘하고, 다 효자효녀래..."
저도 어리다보니, 아빠들의 유일한 낙이었던 자식자랑을 제대로 들어드리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아빠들의 힘의 원동력은 그러한 가족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후에 제가 학원에서 일을 하게 되자, 이번엔 아이들의 입장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족사랑으로 생이별도 마다않고 고생하는 아빠들 마음은 모른 채, 아이들은 아빠들에게 서운함으로 가득차있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우리 아빠는요, 한 달에 한번밖에 못봐요. 아빠 본 지 무지 오래됐어요. 제가 안보고 싶나봐요."
"아빠는 혼자 좋게 살면서 우리는 신경도 안써요."
"아빠는 맨날 바쁘대요. 아빠 미워요. 전 아빠 없어요."



가족그림을 그리면 아빠는 빼 놓고 그리거나, 아빠는 아주 조그맣게, 시커멓게 표현하여 자신의 서운함과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건설현장에서 들었던 아빠들의 자식자랑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습니다. 아빠들은 아이들 생각에 버티고 계시는데, 아이들은 이런 서운함에 가득차 애증을 갖고 있기도 한다는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상처가 크실까요...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은 아빠의 큰 사랑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서운함은 아빠가 정말 밉고, 싫어서는 아닙니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랑하는 아빠인데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황이 싫고, 아빠마음대로 그런 상황을 만들었나 싶어 속이 상해서 부리는 투정일 겁니다. 저렇게 아빠에게 서운함을 잔뜩 표현하던 아이들도,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미리부터 들떠있습니다.
"내일은 아빠오셔서 저 학원 못와요~"
"아빠 오면 보여드리게 잘그린 그림 집에 가져가도 되요?"
"이거 만들기 한거 아빠 드릴거에요~"
하면서 신나합니다. 그렇게 아빠가 오셨다 가시면 한동안 행복해하고, 못보게 되는 날이 길어지면 또 서운해하고.... 행여 아빠가 오시기로 하고 일 때문에 못 오시게라도 되면 서운함이 가중되어 '아빠가 밉다'고 하고.... 그런 것이 아이들 마음인가 봅니다.

건설현장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파견근무를 가는 일 등으로 본의아니게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는 아빠들이 많습니다. 제 또래의 아버지 세대는 비슷한 이유로 이라크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국가에 가셔서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오셨던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희 아빠도 제가 어린 시절 이라크에 다녀오셨습니다.
대여섯살 때라 저는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나중에 다른 분들께 전해들은 이야기로 알았을 뿐 입니다.
"대여섯살 밖에 안된 어린 것이 아빠자리라고 거기서는 아무도 못 자게 하고, 지 아빠 물건이라고 아무도 못 만지게 하고, 아빠를 찾아서 어찌나 마음 짠하던지..."
지금도 할머니는 그 때 이야기를 떠올리시며 애잔해 하시는데, 저는 기억이 없어서 무덤덤하게 제가 그랬었나보다 할 뿐입니다. 이상한 것은 세 살 때 아빠와 박람회간 기억도 있는데, 대 여섯살의 기억만 거짓말처럼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 어렸어도 아빠의 부재는 큰 트라우마가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고생하신 아빠께 참 감사하는데, 그 때 당시에는 저 역시 아이들처럼 "아빠미워.""아빠 가지마" 하며 아빠의 애간장을 녹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도 조금 더 크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했던 아빠 마음을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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