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야하는 것 알면서 하기 싫을때, 일 미루는 심리적 원인

삶의 주인의식 #7 할 일 미루는 습관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현실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피할 수 없을 경우, 일을 미루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겁나 빠른 토끼가 거북이가 되어 일을 미루게 되었을 때

미칠 듯한 스트레스와 싸우고 있을 때 였습니다. 이전까지의 저는 ‘겁나 빠른 토끼형 인간’이었어요. 일 처리 속도가 제법 빠른 편이었죠. 남들이 두 서 너개 처리할 때 대 여섯 개 씩 해내며 뿌듯해했던 때도 많았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겁나 빠른 토끼일 것 같았고,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후딱 해 치워버리면 속 시원한데 왜 일을 미루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필요도 없었고요...


그랬던 내가 거북이가 되었습니다. 마음 고생의 후유증인지, 몸이 아파서인지 원인을 모르겠으나 도무지 일의 진척이 없었습니다. A4 한 장 분량의 사소한 일조차 일주일을 뭉개고 있으려니 미칠 노릇이었어요. 나름 사회생활 짬이 좀 생겨서, 5분이면 처리할 수 있는 일도 하루 이틀 걸린다고 하고, 하루 이틀이면 될 일은 4~5일을 부르긴 했습니다. 그러나 거북이가 되자 그렇게 벌어 놓은 여유시간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거북이가 되자 늘상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지만 ㅇㅇ일까지 마무리 해서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가 일상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ㅠㅠ 토끼 시절에는 그렇게 죄송하다고 할 시간에 일을 해서 넘겨버리면 죄송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북이가 되고 보니, 붙잡고 있지만 머어어엉 했습니다. 집중할 수 있다면 5분, 넉넉히 잡아도 30분이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루에 단 5분조차 집중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머어어어엉 상태가 지속되자, 스마트 기기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뭘 좀 하려고 하면 문자오고, 카톡오고, 이메일이 와서 제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탓을 했습니다. 이런 나날들이 지속되자 스트레스의 늪에 빠졌습니다. 할 일은 자꾸 느는데 끝나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변비처럼 아무 일도 끝나서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일의 변비 상태는 아주 고약했습니다.


(지금은 이 상태에서 회복되어 괜찮아지긴 했어요 :) )



해야 하는 거 알지만 하기 싫다, 그 심리적 이유

왜 일을 미루는 것인지 그 심리적 기제를 찾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일을 뭉개고 있는 것은 ‘불안’ 때문이며, 일을 미루는 것이 자신을 스트레스로부터 보호하는 책략 중 하나라고 합니다. 일을 미루어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일을 미룸으로써 스트레스를 대처하고 있다니 이 무슨 모순인가요?


학술적으로 미루기(procrastination)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발적으로 할 일을 미루는 것’을 미루기라 정의합니다. 미루기의 결과는 누구나 아는 그 부정적인 최후입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심리적 문제 뿐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도 생깁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머리가 아프고, 속이 미식거리고, 알수 없는 질병 (흔히 의사들이 스트레스나 과로 때문이라고 하는 그 병)에 시달립니다. 그런데 미루기가 스트레스 대처 방법이라니 무슨 개똥같은 소리인지....


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일을 미루면서 하는 행동에서 느끼는 쾌감이었습니다. 할 일이 많은데 딴 짓을 할 때, 참 재미납니다. 할 일이 있으면 그거 빼고 다 재밌긴 하죠. 그러나 정말 재미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수없이 미뤄본 경험자로써 보면 글쎄요.

다음 주 월요일 아침까지 마무리할 일이 있는데 불금이라며 미드 보고 있으면 금요일은 그나마 재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부터는 슬슬 불안해집니다. 빨리 일을 시작해야 된다는 걱정이 듭니다. 그렇게 토요일까지 딴짓을 하고 일요일이 되면 미드든 영화든 웅성이는 백색소음 같습니다. 불안해서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 거죠.

할 일 많은데 웹서핑하면서 딴 짓을 하면 그게 정말 재미있었을까요, 글쎄요, 제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을 뿐 재미나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학자들이 ‘순간의 쾌(快)를 위해 미룬다’는 말은 공감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라고 해서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나, 곰곰이 곱씹어 보니, 쾌락보다 유인가로 이해를 하니 제법 말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진정한 쾌락은 아니지만, 잠깐의 딴짓은 회피의 매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좀 더 와 닿은 연구 방향은 미루기가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수동공격(passive-aggressivity)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동공격은 직접적으로 거절하거나 싫다고 하지 못하니까, 알았다고 대답한 후에 안 하거나 천천히 하는 등의 행동으로 저항하는 것 입니다.


스트레스 상황은 뭔가 대상이 있습니다. 일이 하기 싫다거나, 개인이 처리하기에 너무 많다거나. 일을 하기 싫어도 드러내질 못하니까 하기 싫은 일을 질질 끌거나 미루며 일이 잘 안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일을 미루거나 늦게 줘서 엿먹이는 사람의 행동이 정말로 ‘엿 먹이는’ 짓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사자도 자신이 수동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자각은 없었겠지만...

어쩌면 생계가 걸린 일을 미루고 있는 이들은, 생계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을 하면서 내색도 못하는 답답한 심경을 이런 식으로 어떻게든 표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서적 적신호

순간의 재미를 위해 일을 미루는 것이든, 답답한 상황에 수동공격을 하는 것이든, 중요한 것은 이것은 정서적 적신호라는 점입니다. 일시적이든 장기적이든 안 좋은 상태입니다.

“삐, 삐, 삐. 잠깐 너를 좀 돌아봐. 곧 너 터져버릴거야. 심리적으로 터지든 몸이 못 견디든 할꺼니까 지금 좀 쉬어가렴.” 이라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서글프게도 한국의 직장인, 학생, 주부 할 것 없이 만성적 마음의 고질병을 가진 이들이 태반이기 때문에, ‘미루기’가 적신호이며 치료까지 받아야 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심리적 문제에 대해 무엇이든 ‘의지’만 있으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고, 하면 된다고 믿으니까요. 몸이 아플 때 ‘나으려는 의지’만 있으면 낫는다고 하면 답답이 취급을 하나, 마음이 아픈 것에 대한 인식은 가히 5~60년대 수준이지요.... 이미 마음이 병나서 아픈데 어떻게 스스로 ‘의지’를 갖고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덧붙이자면, 학교나 회사의 상담센터에서는 미루기에 대해 진지하게 상담을 해주고, 미루기 관련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센터들도 꽤 있습니다. 미루는 습관이 심각하거나,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 하기 싫어서 계속 미루는 증상은 그냥 게으르거나 한심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심리적 문제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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